'언덕 위의 하얀 집'이란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단어가 어디서 유래된 말인지 알고 계신가요? 지금은 강원도 여행하면 떠오르는 기차역으로 유명한 청량리는 1980년대만 해도 정신병원이 있는 곳,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1945년 청량리뇌병원으로 개원한 국내 최초의 정신병원인 청량리정신병원은 한때 500병상을 웃도는 규모로 운영되기도 했지요. '언덕 위의 하얀 집'은 이 청량리정신병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외국에서는 정신질환자를 '뻐꾸기', 정신병원은 '뻐꾸기 둥지'라고 부르는데요. 왜 정신병원을 이처럼 은밀한 용어로 부르는 걸까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병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정신병자'라는 낙인까지 붙어 다닙니다. 이 낙인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역할을 하고, 정신병을 앓는 사람을 비정상으로 여기게 하며, 그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를 격리하고 추방해도 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지요.
조현병을 비롯한 다른 정신질환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고 이들은 신체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과 똑같은 환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피켓을 들고 정신건강과 관련된 시설을 '혐오시설'로 여겨 반대합니다. 정신병원 때문에 지역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집값이 떨어지며, 자신과 자녀가 위험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신과와 정신질환자에 대한 공포 반응을 일으킵니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이 비질환자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는 통계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우린 모두 낮과 밤을 오가며 산다. 우리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경계인들이다."
정신질환이 있음과 없음. 그 분명한 경계가 없다는 말이 어떻게 보면 좌절스럽도록 모호할 수 있지만, 저에게는 정상과 비정상, 경계에 관한 깨달음을 주는 대사였어요. 오늘 소개해드릴 책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에도 비슷한 문장이 나오는데요. 앨런 프랜시스의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에서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개념을 구분하기 위한 문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두 용어는 상대의 부정으로서만 정의될 뿐이다. 각각에 대한 진정한 정의는 없고, 둘을 가르는 유의미한 기준선도 없다."
정신질환에 대한 잘못된 편견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 치료가 아닌 벌칙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 단지 중증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픔을 표현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배제되고 타인의 냉대를 견뎌야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사람대접을 받고, 자신의 아픔을 인정받고 마음껏 마음을 아파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에세이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소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