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란 게 참 신기해요. 입추가 지나니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게 시원하네요. 더위가 한풀 꺾였는데, 내린다던 비가 내리지 않은 게 아쉽습니다.
그사이에 여름휴가도 다녀왔습니다. 시골에 내려가서 먹고 자고를 반복하면서 푹 쉬었어요. 어제 몸무게를 재보니 80킬로그램이더라고요. 정상체중의 벽을 깨고 과체중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혹시 이것도 가을이 오고 있다는 신호일까요. 아무튼 책 읽기 좋고 놀기에는 더 좋은 계절이 오고 있네요.
📌 CONTENTS 📌
일상과 사담 I 100시간짜리 보드게임 한 판?
근간 소식 I 한나 아렌트 유고집 『정치의 약속』
일상과 사담
100시간짜리 보드게임 한 판?
이번 주말에는 친구들과 보드게임 하나를 시작했습니다. 게임 이름은 글룸헤이븐(Gloomhaven)이에요. 무게만 10킬로그램이고 값은 20만 원이 넘습니다. 진행에 100시간 이상 걸린다고 하네요. 그런데도 보드게임 커뮤니티 종합순위 1위 자리를 오랫동안 지킨 게임이래요. 참가자들이 폐허를 탐사하며 용사를 성장시키고, 도시를 발전시켜나가는 게임입니다. 같이 규칙 안내서에 코를 박고 한참 공부한 뒤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하루가 지났어요.
같이 게임하는 친구들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입니다. 중학교 이후로는 이사와 진학과 취업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어요. 저는 파주로 왔고, 누구는 대전에 갔고, 누구는 기숙학교에 들어갔죠. 그러다 보니 예닐곱 명이 한꺼번에 모이는 날은 일 년에 한두 번 만들기도 어려웠어요. 채팅방도 연휴나 누구 생일 아니면 조용했고요. 그런데 올해 다들 학업을 마치고 병역 문제도 해결하면서 뜻밖에 동네에 다시 모였어요. 보드게임이라는 핑계가 생겼으니 계속 자주 보면 좋겠네요.
근간 소식
한나 아렌트 유고집
『정치의 약속』
요즘 편집하고 있는 한나 아렌트 『정치의 약속』에도 친구와 시간 보내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와요. 아렌트의 강의 조교였던 제롬 콘이 정치사상의 전통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아렌트의 유고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정치의 약속』의 시작에서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절대적인 진리인 ‘이데아’를 찾으려 했던 플라톤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과 대화하면서 친구가 되고, 그 사람의 관점에서만 볼 수 있는 걸 끄집어내려 했다는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 다른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아렌트의 복수성 개념과도 맞닿아 있죠.
다들 아는 것처럼 이런 소크라테스의 방식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산파술은 누군가를 설득해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소크라테스는 재판관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자신을 탈출시키려는 친구들도 설득하지 못했어요. 아테네는 소크라테스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소크라테스 역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데 실패한 셈입니다.
자크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이런 죽음을 지켜본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아주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시민이 위대한 철학자를 죽이고 철학을 묻어버리는데, 철학자가 시민들과 어울려 정치에 참여해야 할까요? 진리를 아는 사람이 왜 굳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할까요? 아예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면 어떨까요? 이렇게 ‘철인정치’라는 거창한 구상이 등장했어요.
아렌트는 플라톤과 생각이 다릅니다. 혼자 진리를 발견하는 것보다, 서로 다른 눈으로 세계를 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요. 누구도 세계 전체를 혼자 알아낼 수는 없으니까요. 아렌트는 『정치의 약속』에서 함께 살기가 무엇인지 전반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시작해 마르크스, 자유와 권위, 두 차례 세계대전까지 정치사상사를 되짚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렌트의 글을 읽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대목이 하나 보입니다. 인생이란 원래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는 거죠. 여럿이서 뭔가를 할 때는 남들을 설득하고 함께 움직여야 뜻을 이룰 수 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을 시작하고 나면 내 손을 떠나는 때가 오기 마련인 건지, 예상하지 못한 반응과 부딪혀 엉뚱하게 돼버리곤 해요. 아무리 협동 정신을 발휘해도 마찬가지고요.
글룸헤이븐에서는 매 차례 각자 사용할 카드를 고르고, 서로에게 공개하기 전에 작전을 짭니다. “내가 해골을 기절시킬 테니 네가 처치해” “방어력 높은 전사가 앞장서” 하면서요. 여기까지는 좋은데, 카드를 공개하고 나면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적을 기절시키기 전에 다른 영웅이 움직이고, 적은 방패를 든 전사 대신 마법사를 두들겨 팹니다. 분명 완벽하게 합의된 작전이었는데요. 누구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렌트는 이게 다 마땅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저 계획에 맞춰 모든 게 ‘제작’된다면 인간에게 자유는 없다고 말해요. 사람 사이 일에 완벽한 통제가 가능하다면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고, 사회는 완벽을 위한 과정을 강제하는 전체주의가 된다는 거죠. 우연도 놀라움도 새로운 시작도 없는 세상입니다.
한나절 동안 두 번 전멸했고 세 번 탐험을 성공시켰습니다. 깔깔 웃으면서 자리를 치우는데, 토큰이니 피규어니 지도니 하는 구성요소가 워낙 많아서 정돈이 안 되더라고요. 뚜껑이 원래보다 5센티미터는 솟아올랐어요. 온라인으로도 즐길 수 있는 모양인데, 앞으로도 굳이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